맥주의 역사 2탄 : 맥주 순수령은 무엇인가

맥주 순수령

맥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맥주를 좋아하는 분들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거예요. 맥주순수령!

맥주를 만들 때는 물, 맥아(싹튼 보리), 홉 이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 꽝꽝! 1516년 바이에른(독일의 뮌헨 지방)의 영주 빌헬름 4세가 공포한 법입니다. 법이니 지켜야겠죠? 안 지키면? 아래 그림처럼 쇠창살 우리 안에 가두어서 물에 담가버립니다.

앗? 근데 뭐가 빠진 거 같죠? 네, 맞습니다. 효모가 빠졌네요. 사실 그런데 저 당시에는 효모가 뭔지 몰랐습니다. 그냥 맥아를 물에 넣고 끓여 놓으면 자연이 알아서 술을 만들어 주는 줄로만 알았지요. 공기 중의 효모가 맥주를 발효시킨다는 건 나중에 19세기에 페니실린으로 유명한 파르퇴르 박사가 발견한 뒤에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랑비크 방식의 자연 발효 형태로 발효했죠.

 

맥주 순수령이 공포되고 난 뒤 맥주계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동안은 맥주에 여러 가지 첨가물을 넣었습니다. 맛있으면 그만 독특한 맥주를 만들자고 종이 조각, 물고기 부레, 심지어 사람 손가락까지 넣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중세에 위생 개념이 없다시피 해서 가능했던 일이죠.

 

맥주 순수령은 지금으로 따지자면 식품위생법이나 다름없습니다.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온갖 재료로 장난쳐 승부하던 양조장이 오로지 주어진 재료만 가지고 맥주의 질로 승부하게 됩니다. 이때 맥주의 양조 기술도 표준화되고 발달하게 되죠.

맥주 순수령의 이면

그렇다면 맥주 순수령이 이렇게 순수한 의도로 만들어졌느냐? 단점은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맥주 순수령이 공포된 의도를 보면 조금 얄미운 의도가 있습니다. 이 맥주 순수령을 공포한 건 바이에른의 영주였습니다. 공포하기 이전에는 밀을 첨가 해서 만드는 바이젠(밀맥주)이 무척이나 인기가 많았답니다. 하지만 자꾸 업자들이 빵 만들 밀도 부족한데 밀로 맥주를 만들어 버리니까 밀 값이 폭등하게 됩니다. 그래서 밀 값을 안정시키려고 맥주 순수령을 만든 거죠.

 

근데 웃기는 건 정작 바이에른 영주의 직영지인 바이에른에서만은 밀맥주를 만드는 걸 허락합니다. 자신의 권력은 유지하기 위한 속셈이었던 거였고 이는 곧 독점이었죠. 그래서 밀맥주 앙조장은 바이에른 지방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독일에서는 바이에른 주에 밀맥주 양조장이 다 몰려 있습니다.

 

맥주 순수령이 나오고 난 뒤에 지역마다 특색이 있던 맥주들이 거의 대부분 멸종해 버리게 되죠. 맥주의 백화점이라고 하는 벨기에는 맥주 순수령의 영향을 받지 않은 탓에 정말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만든 수많은 스타일의 맥주가 존재하지만, 독일에서 특색이 있는 맥주를 찾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예를 든다면 쾰시(Kölsch; 상면 발효 하면 숙성), 알트 비어(Alt Bier; 상면 발효 하면 숙성), 켈러비어 (Kellerbier; 지하실에서 숙성한 쿰쿰한 맥주), 라우흐비어(Rauchbier; 훈제 맥주)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맥주들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도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둔켈(Munich Dunkel Lager)의 탄생

이런 맥주 순수령에 따라 제조된 맥주가 바로 둔켈입니다. 정식 스타일 명은 "Munich Dunkel Lager" 입니다. "뮌헨의 어두운 라거"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 이 스타일의 별칭이 있는데 바로 "Origin of Lager"입니다. 라거 맥주의 원형이라는 뜻이죠.

 

이 둔켈은 맥주 순수령에 따라 제조된 모범생 같은 녀석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독일의 주력 맥주로 자리매김 하지요. 이 둔켈이 까만 이유는 까맣게 태운 맥아를 쓰기 때문입니다. 맥아도 커피 원두처럼 로스팅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맥주 만드는 공정을 다룰 때 또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까맣게 태운 맥아를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서 최종 결과물인 맥주의 쓴맛, 커피맛, 보리 맛이 결정되고, 맥주의 색도 결정이 됩니다.

 

이 둔켈이 라거의 시초입니다. 17세기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발달했고, 앞서 설명했듯이 동굴에 저장해(lagern) 낮은 온도에서 숙성하는 방식이어서 라거(Lager)라고 이름이 지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황금색 라거와는 거리가 좀 멀게 느껴집니다.

필스너(Pilsner)의 탄생

그러면 우리가 아는 황금색 맥주는 언제쯤 등장하게 되는 걸까요? 시간은 흘러 흘러 라거의 주무대는 독일에서 체코로 흘러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838년 체코 플젠(Plzeň)에서는 성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맛없는 맥주 36통을 깨 부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때 당시 체코의 맥주는 에일 위주였는데, 맛도 없고 가격도 비싸고, 무엇보다 관리도 허술하여 쉰 맥주가 유통되는 일이 다반사였거든요. 그러자, 시의회에서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해서 시민 양조장(Burgher Brewery)을 설립하고는 독일의 바이에른에서 25살의 젊은 양조자 요세프 구룰(Josef Groll)을 데려옵니다.

그에게는 절호의 찬스였을 겁니다. 하지만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물이 달랐습니다. 바이에른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된 경수(硬水, 센물, hard water)였지만, 플젠은 연수(軟水, 단물, soft water)였습니다. 경수냐 연수냐에 따라 홍차 맛도 달라진다는데, 발효하고 숙성하는 맥주는 오죽할까요? 또한 독일의 홉을 수입해서 쓰기는 비싸니 체코의 자츠(saaz) 홉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맥아도 둔켈처럼 태운 맥아가 아닌 살짝 건조한 옅은 색의 맥아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4년의 연구 끝에 황금색의 쌉싸름한 맥주, 필스너(Pilsner)가 탄생합니다. 플젠의 독일어 지명이 필센(Pilsen)이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입니다. 원래 필세너(Pilsener)였는데 e가 빠지고 필스너(Pilsner)가 되었지요.

둔켈 라거나 기존에 마시던 거무튀튀한 에일이 아니라 부드럽고, 산뜻하고 , 쌉싸래하고, 청량감 가득한 라거가 나왔으니 맥주 시장이 어찌 되었을까요?

 

이 맥주는 정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처음엔 체코 주변에 짜츠 홉과 연수가 나는 도시에서부터 양조되기 시작하더니 19세기 말에 가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3국 지방까지 양조장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는 너도 나도 자신들의 맥주에도 필스너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필센에서 만든 것도 아닌데 필스너라니! 원산지 허위 표기지요. 억울했던 필센 시민 양조장은 상표를 가지고 법적 분쟁을 벌입니다. 뮌헨의 Thomass 양조장의 Thomass-Pilsner-Bier를 쓰지 못하게 해 달라고 소송을 벌이죠. 하지만 재판은 독일 뮌헨에서 진행이 되었고 판사는 독일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미 다들 쓰는데, 그냥 쓰게 하자. 이제 Pilsner는 맥주 브랜드가 아니라, 그냥 스타일을 의미하는 거다.

 

판결이 이리 나버렸죠. 우리나라 부산어묵과 같은 판결이 내려집니다. 부산에서 생산되지 않은 어묵도 현재는 부산어묵이라고 표기할 수 있습니다. 부산식 어묵 제조 스타일을 의미하는 거라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필센의 양조장은 1898년 필스너의 이름에 우르켈(Urquell)이라는 이름을 덧붙입니다. Ur는 original이라는 뜻이며, Quell는 source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원조 필스너라는 뜻이지요. 이게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이 나온 배경입니다.

이 필스너 우르켈이 현대의 황금색 라거의 어머니입니다. 대형 마트에서 할인을 많이 해서 개당 2,500원 꼴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서 수입 맥주를 먹어보고 싶다고 추천을 해달라고 하면 제일 먼저 이 맥주를 권하고 있지요. 무엇보다 우리가 먹던 라거와 가장 가까워 거부감이 적고, 가격도 싸고,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써서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함정

한편, 독일의 필스너들은 왠지 미안해졌나 봅니다. 아니면 소송 이후 소심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독일 필스너들은 필스너(Pilsner)라는 명칭 대신 필세너(Pilsener)나 필스(Pils)라고 많이 표기합니다. 물론 Pilsner의 다른 표기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스타일에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건 드뭅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추측이긴 한데, 조심하는 분위기가 아닐까 합니다.

 

필스(pils)라고 표기되어 있어도 당황하지 말고, 아 황금빛 라거 필스너구나! 하면 맞습니다.

요즘에는 체코 플젠 지방의 맥주도 아니면서 필스너(Pilsner)라는 이름을 당당히 쓰는 맥주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필스너 스타일

필스너 스타일은 는 크게 체코 필스너(Bohemian Pilsner)독일 필스너(German Pilsner)로 구분하는데, 독일 필스너는 체코에서 건너온 필스너를 말해요. 필스너는 이후 여러 가지 라거 스타일의 모태가 됩니다. 그래서 맥주 역사에 있어 필스너와 필스너 우르켈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전 편과 이번 편을 통해 맥주의 역사, 그중에서 에일과 라거가 어떻게 생겨 났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이후에 다루어볼 근현대사가 있지만 그건 또 나중으로 미룰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