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맛 중 spicy 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맥주라는 주류가 아무래도 유럽과 미국을 위시한 서양문화권에서 발달했다 보니 자연스럽게 맥주를 표현하는 단어들도 외래어 위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나마 가장 익숙한 외국어인 영어 표현들에 익숙해지는 편이지만 영어 표현이 우리말에 정확히 1:1 대응이 되지 않다 보니 한국 사람들의 사고나 정서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RB 나 BA 의 시음평, 그리고 유명 맥주계 인사가 작성한 영어 시음 기를 읽어보면 표현이 현란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맥주 스타일에 맞는 용어, 해당 스타일의 맥주 재료에서 찾을 수 있는 맛 표현, 시음기에 자주 들어가는 핵심적인 단어들이 나열되는 정도입니다.

 

따라서 맥주 시음기에 자주 보이는 중요한 맛 표현, 영단어들의 뜻을 숙지한다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지만 나머지 절반은 단순히 영어 단어를 이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더군요.

 

저는 맥주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전 스파이시(Spicy) 라는 영단어를 보고 항상 떠올린 이미지는 Hot & Spicy로 불닭이나 낙지볶음, 할라피뇨 고추가 든 멕시코 음식 등을 상상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맥주 시음 평에서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인 Spicy를 보면 공감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들었습니다.

 

Hot & Spicy 의 이미지와 정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황금빛의 필스너나 누런 헤페-바이스비어, 벨기에 에일을 마신 시음기에서 Spicy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 '서양애들 입 맛은 우리랑 차원이 다른가 보다'라고 생각했었죠.

 

조금 극단적인 상황 연출이기는 하지만 오늘 제가 시음기를 작성하려고 마신 맥주가 '벨지안 라이(호밀) IPA + 코리엔더' 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제가 영어에 능통한 현지인으로 시크하게 시음 기를 작성한다면 이렇게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벨지안 에일 효모 풍미가 Spicy 하며 Spicy 한 홉의 폭격도 인상적임.  호밀의 Spicy 가 뒷 마무리를 해준다. 코리엔더의 Spicy 도 가끔 포착된다."


RB 나 BA 에서 잔 뼈가 굵은 마니아라면 그리 난해하지 않을 시음 기겠지만, 맥주 시음의 요령이 없는 비영어권의 한국인이라면 정말 뭔 소린지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만약 오래전에 저였다면 맵고 맵고 맵고 매운 맥주라고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네요.  위의 시음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앞에서부터 1번, 2번, 3번, 4번 Spicy로 번호를 매겨보겠습니다. 1번 Spicy는 벨지안 효모 풍미가 되겠죠.

 

벨기에 효모 Spicy 의 해석을 위해 미국의 효모 기업인 화이트 랩스(White Labs)의 벨기에 에일 효모들의 정보를 발췌했습니다. 벨기에 효모들에 관한 설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가 검은 상자로 표시해놓은 Spicy라는 단어입니다. 그냥 Spicy라고도 쓰이기도 하나, 단어의 혼선을 막기 위해 후추(Peppery) 같은 Spicy, 페놀(치과 약품?) 같은 Spicy 가 나타난다고 적혀있네요.

 

벨기에 에일 효모를 비롯하여 독일 바이스비어 효모에서는 특유의 페놀이나 정향(Clove)와 같은 Spicy 한 향기가 풍깁니다. 벨기에/독일 바이젠에서는 필수적인 풍미로 효모와 관련된 용어로 Spicy를 말하면 대부분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말로 1번 Spicy 를 풀어쓰려면 '벨기에 에일 or 바이젠 효모에서 나오는 특유의 치과 약품(페놀도 와닿지 않는 단어), 후추, 정향과 같은 맛' 이 되겠죠. 더 쉽게 표현하면 입 안이 화해지는 맛입니다. 

 

2번 Spicy 인 홉에 관한 해석입니다. 모든 품종의 홉의 설명에 Spicy 한 성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Spicy는 시트러스(Citrus), 열대과일(Tropical), 땅/흙(Earthy), 건과일(Dried Fruits) 등과 함께 홉 풍미 설명에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필스너 류의 홉이 위주가 된 맥주일 수록 특유의 풀(Grass) 맛이나 허브, 솔(Pine) 등의 상쾌하면서 식물과 같은 씁쓸한 맛이 표출됩니다. 홉이 극단적으로 많이 첨가된 IPA 류에서는 강렬한 쓴 맛이 혀를 때리고 얼얼하게 만드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데, 이럴 때 보통 Spicy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됩니다.

 

IPA 류를 자주 마셔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확실히 홉(Hop)에서 나온 Spicy 는 벨기에/바이젠에서 나온 Spicy 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죠.

 

3번 Spicy 는 호밀(Rye)에 관한 항목입니다. 호밀은 밀(Wheat)처럼 전통적으로 맥주에 자주 사용되던 원재료는 아니었습니다. 독일에서도 정말 매우 흔하지 않은 Roggenbier 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빛을 본 건 크래프트 맥주 씬에서 호밀(Rye)의 독특한 풍미가 새로운 맥주 맛을 창조하는데 일조할 거라는 사고가 퍼지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제는 신식 크래프트 맥주 세계에서는 매우 익숙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호밀(Rye)이 맛에서 각광받는 재료가 된 것은 특유의 얼얼함과 알싸하게 입 안에서 퍼지는 맛 때문입니다. 효모 Spicy 나홉 Spicy는 어떠한 대상의 그 맛이 빗대어지지만, 호밀의 Spicy는 그 보다 더 원초적인 알싸함으로 개인적으로 호밀 Spicy 는 맛(Flavor)의 실체가 있다기보다는 입안에 퍼지는 현상에 주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벨기에/바이젠 효모는 얼얼한 Spicy 이외에 단 맛이나 바나나 과일 맛 등을 동반하며, 홉은 감귤류나 열대 과일, 허브 등을 부가 풍미를 대동하는 것에 반해, 호밀은 질펀한 질감과 무게감을 가져올 뿐 맛은 Spicy 이외에는 딱히 없다고 봅니다.

 

4번 Spicy는 Spicy라는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아닐까 봅니다. Spicy라는 단어가 양념/향신료를 뜻하는 명사 Spice에서 온 것임을 본 다면, 맥주에 부재료로 간간히 첨가되는 향신료인 코리엔더(고수)나 넛맥(Nutmeg), 계피 등등의 맛이 맥주 안에서 드러나면 보통 Spicy라는 용어가 출현합니다.

 

우리말로는 향신료의 향긋함?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 되겠죠. 향신료 마다 맛도 다르니 맛의 표현은 차이가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Spicy는 달고 갑니다. 향신료마다 어떻게 Spicy 하냐는 게 관건이 되겠죠.


자, 그럼 지금까지 해석 풀이를 해 보았으니 위에서 나왔던 '벨지안 라이 IPA + 코리엔더' 의 시음평을 다시 가져와 보면
"벨지안 에일 효모 풍미가 Spicy 하며 Spicy 한 홉의 폭격도 인상적임.  호밀의 Spicy 가 뒷 마무리를 해준다. 코리엔더의 Spicy 도 가끔 포착된다."


아까 보다는 조금 더 시음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나요? 사실 맛이라는 것을 마셔보지 않고 글로만 평가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으니 가장 빠른 이해 방법은 벨기에 에일 / IPA / Rye Ale / 향신료가 첨가된 맥주 등을 따로따로 접해보는 것이긴 합니다.

 

어느 정도 각각의 Spicy 맛이 파악이 된 후라면, 설사 벨지안 라이 IPA에서 4 가지 Spicy를 미각으로 다 못 느꼈다고 해도 머리로는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미각으로 느끼지 못한것을 머리로만 느끼는 게 시음이냐?'라고 반론이 생기기도 하나, 개인적인 시음에 관한 견해는 인간의 오감에 있어서는 개인마다 한계가 있으니 감각이 약해 못 느끼는 걸 억지로 접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못 느끼더라도 재료의 파악과 스타일의 이해를 통해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시음기 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섭취를 한 후 '필스너에서 초컬릿 맛이 나요!' 등의 공감되지 않는 평이 자제가 된, 어느 정도 객관화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의 취향과 입 맛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미각에 따른 자의적인 해석에만 의존한다면 Spicy라는 단어를 통해 양산된 괴이한 시음평들이 난무할 수도 있으니 말이죠.

 

4 가지 Spicy 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에 따라 Sour Ale의 시큼하고 쏘는 맛을 Spicy (충격적이라는 의미로)라고 하기도, 도수가 높은 맥주에서 나오는 알코올 맛을 Spicy라고도, 할라피뇨 졸로키아, 하바네로 등의 고추가 들어간 맥주도 Hot & Spicy 개념에서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저도 매번 맥주를 마시면서 시음기를 작성하는 한 사람으로서 시음평을 그냥 'Spicy 한 홉 맛에 Spicy 한 효모 맛'으로 표현한다면 참 편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혼자만 아는 암호와 같은 시음평이 될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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